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탐보라 화산 (문단 편집) == 여담 == * 탐보라 화산의 기록적인 분화로부터 겨우 18년 후인 1833년,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에서 [[남아시아 대지진#s-3|규모 M9.0^^±0.2^^의 거대지진과 쓰나미]]가 발생하여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다.[* 사상자 등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으나 당시 추정 규모와 쓰나미가 발생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2004년 남아시아 대지진]]과 피해 유형 등에서 비슷했을 것으로 보인다.] 뒤이어 1883년에는 [[크라카타우 화산]]이 폭발하여 3만 6천여명이 죽었으며 똑같이 유럽에 한파가 벌어져 200만 여명이 죽었다. 인간의 시점에서는 1815년의 탐보라 화산 폭발과 1833년 수마트라 대지진, 1883년 크라카타우 화산 폭발이 꽤 시차가 있는 별개의 사건들로 보이기 마련이지만, 전지구적 시점에서는 상당히 근소한 시차로 인도네시아 지방에서 대규모 재해들이 발생한 경우에 해당한다. 물론 당시 인도네시아 지역에서 살던 사람들에게는 하나하나가 다 지옥같은 시간이었겠지만. * 1815년 탐보라 화산 분화보다 작은 1883년 [[크라카타우 화산]] 분화나 [[베수비오산]] 분화가 더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는 탐보라 화산 폭발의 인문사회적 영향력이 적었기 때문이다. * 1883년 크라카타우 화산 분화 때는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 열강들이 활발하게 식민진출을 한 상태에서 인도네시아 지역에도 적잖은 유럽인이 머물고 있었고, 세계적 자연재해에 대중의 관심도 높아 이들 국가에서는 화산 폭발에 대한 매우 자세하고 생생한 신문 보도들이 이루어졌다. 심지어 [[축음기]]를 통해 폭발 소리를 초보적이나마 녹음이 가능할 정도였다. 덕분에 유럽인들이 작성한 상세한 기록과 증언 및 과학적 조사자료 등이 남아있어서, 이를 토대로 지금도 [[크라카타우 화산]]이 세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고 대규모 화산 분화의 대표로 자주 언급될 정도로 유명하게 되었다. * 반면 1815년의 탐보라 화산 분화의 경우, 폭발 규모와 그 여파 자체는 기원후 세계제일의 수준이었으나, 직접 그 피해를 감당해야 했던 당시 인도네시아 지역의 국가들이 세계사적인 존재감이 없는 소국들이었는데다가 지리적으로도 비교적 격리된 바다 한 가운데의, 인접한 주요국이 없다시피한 위치에서 터진 사건이라 세계적 시선을 끌지도, 대단한 기록을 남기지도 못했다. 마침 이 지역에 진출해있던 [[네덜란드령 동인도]]조차 유럽의 본국이 영국 및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박살나며 맛탱이가 가있는 상태. 유럽 열강이 침 묻혀둔 곳인 탓에 아랍권 및 중화권 국가들과도 별 관련이 없는 지역이었고, 이슬람계 인도네시아 원주민 국가들의 존재감은 동남아시아를 벗어나면 0에 수렴하는 상황이다보니 당시 이 지역 주민들이 대재앙에 난리가 났어도 세계 다른 지역에서는 화산의 분화 사실조차 거의 모르는 상태였던 것이다. 당시에도 세계적인 시선을 끌거나 기록을 남기지 못한데다 이후로도 재조명될 일이 거의 없다보니 탐보라 화산 분화는 아는 사람만 알고 일반대중은 잘 모르는 화산 폭발이 되었다. 분화 규모에 비해 세계사 및 인문사회적 영향력이 적어 기록이 부실한 점은 비슷한 규모의 폭발로 추정되는 [[백두산#s-6.1|백두산]] 분화와도 같다. * 화산 폭발의 여파로 인근의 탐보라족이 '''멸족'''하고 말았고, 이들이 쓰던 탐보라어는 기록이 미비해 [[미분류 언어]]로 남았다. [[분류:1815년/사건사고]][[분류:화산 폭발]][[분류:인도네시아의 지리]][[분류:인도네시아의 사건 사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